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스부르크 가문 (문단 편집) === 가풍 === 중세 이래 현대까지 수백년 동안 지속된 가문이기 때문에 가풍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면과 진보적,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이 공존하고 있다. 특히 종교에 있어서는 다소 보수적이었지만, 정치와 문화에서는 실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특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와 스페인 압스부르고가 갈라진 후 상대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는 실리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이는 가문의 분할 당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시조가 된 [[페르디난트 1세]]와 스페인 압스부르고로 적통이 이어진 [[카를 5세]] 형제의 성향 차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종교적 측면에서 보수적인 면모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경우는 이것은 특히 종교전쟁기에 국한되어 있다. 이는 어릴 적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던 [[페르디난트 2세]]의 개인적인 성향과 황제의 자금줄 역할을 했던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이를 제외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체적으로 동시대의 다른 가문에 비해 현실적,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면모는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스페인 압스부르고는 오스트리아계에 비해서는 보수적인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웃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 비해서는 매우 관용적인 정치를 펼쳤다. 사실 스페인은 국가 자체가 [[레콩키스타]]로 탄생했기 때문에, 종교가 갖는 영향력이 오스트리아보다 훨씬 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에게 수도 빈이 포위된 게 2번이고, 스페인은 통째로 이슬람에게 탈환한 다음에도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맞부딪쳤으니 종교색을 안 띄는게 불가능한 지형이기도 했다. 16세기 이래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정책이 대성공을 거두어 유럽 각지에 걸친 다민족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이웃 프랑스 왕국과는 달리 합병된 소수민족 영토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르는 대신 해당 지역의 문화, 언어를 상당히 존중해 주는 관용적인 통치를 펼쳤다. 이런 민족적 관용 정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몰락하는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합스부르크는 [[1848년 혁명]] 이후에도 헝가리의 혁명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을 무작정 탄압하지 않고 [[대타협]]으로 해결하는 유연함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사라예보 사건]] 때문에 빛을 못 보았으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계획'도 합스부르크식 유연함을 잘 보여준다. 이런 합스부르크의 민족적 관용 정신은 시대를 앞서 나간 것이었는데, 덕분에 다민족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이 꽤 오랜 동안 별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었다. 오늘날 잘못 알려진 것과는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 하에서 비독일계 민족들의 불만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대체로 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긍정하고 그들의 지배를 환영했다.[* 물론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싫어하는 민족들도 있었다. 가령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자국]]을 [[폴란드 분할|멸망시키는 데 일조]]했기에 합스부르크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래도 [[크라쿠프 대공국|크라카우]]에 [[프란츠 요제프 1세|합스부르크 황제]]가 방문할 때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포젠|독일령 폴란드]]나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들보다는 불만이 덜했다. [[체코인]]은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었지만 실패한 이후에는 제국 내에서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입장을 선회했고, [[헝가리인]]은 현재 루마니아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에 기반을 두었던 동부 귀족들을 필두로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쿠루츠 봉기나 [[1848년 헝가리 혁명]]은 대부분 트란실바니아나 현재 헝가리 북동부가 주요 전쟁터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형식상 지배자라는 타이틀만 가져갔을 뿐 그들의 고유 문화와 제도에 거의 터치하지 않았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했다. 헝가리 왕국과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원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때문이었다. 동유럽인들은 언제 있을지 모를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항상 두려워했고, 합스부르크를 그들을 지켜줄 구원자로 여기기까지 했다. 게다가 독일계가 아니라고 해도 본토 오스트리아인에 비해 딱히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독일계와 헝가리인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활동했다. 이런 민족적, 문화적 관용은 오스트리아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스페인 압스부르고에서조차도 나타나는데, 일례로 [[카탈루냐]]에 대해서 압스부르고 왕조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하였지만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고 들어선 [[프랑스인|프랑스계]] [[보르본 왕조]]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현재 카탈루냐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고 말하는 1714년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보르본 왕조의 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다. 이말은 역으로 그전 합스부르크 시절에는 카탈루냐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치를 누렸음을 뜻한다. 물론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관용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만큼 전면적인 것은 아니어서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온건한 성향은 [[봉건주의]]가 마지막까지 건재했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프랑스 등 다른 봉건국가들이 차례차례 내부의 개혁-혁명 압력에 붕괴되거나 굴복할 때, 합스부르크 왕조는 건재했다는 것 자체가 피지배 계층의 지지-동의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결국 합스부르크는 자본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산업혁명 등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이를 무너뜨리려면 세계대전의 패배가 필요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도 그렇고, 스페인도 사실 종교 개혁, 교파화(confessionalization) 시대 유럽 열강 정치판의 중심에 있어서 종교적인 면에서 워낙 독선적이었던 것이지, 종교를 뺀 세속 정치문화면에선 상당히 관용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본토의 경우만 하더라도 전임 가톨릭 부부왕의 문화, 교육 진흥 정책을 이어받아 인문주의에 기반한 대학 설립을 통한 관리, 공무원, 법률 전문계층 양성을 통해 드넒은 [[스페인 제국]]을 성공적으로 통치했고, 당장 안방인 [[카스티야]]의 1520년 코무네로스 봉기부터 강제 개종당한 [[그라나다 왕국]]의 무어인 봉기, 17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의 쌍방울 반란 등을 겪으면서도 역시 종교문제가 걸려 대학살과 [[무어인 추방]]으로 끝난 무어인 문제만 빼곤 대부분 패배한 반란 세력을 주동자 몇몇만 처형하고, 압류된 재산이나 작위도 한세대 뒤에 복권시켜주는 등 관대한 처분을 통해 국내 안정을 이루었다. 신대륙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참극의 역사속에서, 사실 [[톨레도]], [[세비야]], [[마드리드]]에 소재한 본토 왕실과 정부는 1512년 부르고스 칙령, 1542년 원주민 신법안, 1550년 [[바야돌리드 논쟁]] 등을 통해 엄연한 스페인 왕실의 신하로서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하고, [[콩키스타도르]]와 엔코미엔다 지주들로부터 보호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시기 벌어진 신대륙 원주민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은 대부분 현지 콩키스타도르, 엔코미엔데로(Encomiendero, 말그대로 엔코미엔다를 소유한 지주)들의 사적 탐욕 등에 의해 벌어졌고, 원주민들이 어마어마한 숫자로 죽어나긴 했으나 이건 구대륙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 문제가 훨씬 더 컸고, 원주민들을 절멸이 아니라 개종, 노동력 징발의 대상으로 보았던 스페인 당국은 오히려 [[선교사]]들을 통한 구호 활동을 통해 토착민 숫자를 보전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 행정 체계 수립 노력도 16세기 후반쯤 되면 제대로 된 성과를 발휘, 현지 부왕령에서 직접 다스리는 식민 거점 도시들을 제외한 농촌과 밀림의 원주민들은 공물과 노동 징발 대신 현지 자치를 인정 받는 원주민 영방 (República de indios) 체제가 자리잡았다. 현실 정치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대 통치자들은 매우 현실적, 실리적 면모를 보일 때가 많았는데, 합스부르크의 황제들은 새로운 제도와 문물을 앞서 수용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실리적인 면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서 더욱 부각된다. 초장기 합스부르크 가문은 푸거 가문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신성 로마 제국]] 제위의 세습을 굳히는 등 가문을 확장하는데 적극 이용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경제사학계에서도 금융의 선진화를 앞당긴 사례로 평가받기도 한다. 다른 가문이 영토를 넓히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막시밀리안 1세 등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결혼 정책을 통해 손쉽게 가문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는데, 이 역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실리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물론 합스부르크의 이런 결혼 정책도 공짜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자존심을 굽히고 수십년 동안 타가문과 유대관계를 지속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합스부르크에서 고지식했던 통치자에 속했던 [[카를 5세]]도 [[화승총]] 부대를 도입하여 유럽 전쟁사에서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에는 계몽군주인 [[요제프 2세]]가 나타나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며 신기술과 제도를 도입하는데 앞장섰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이후 오스트리아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취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시대를 앞서나가는 굉장히 리버럴한 분위기의 나라였다. [[빈 체제]]로 인해 보수주의자로 평가되는 [[프란츠 2세]]는 비록 정치체제와 종교에서는 보수적이었지만, 과학과 예술을 적극 후원했고 신기술도 적극 도입해 [[도나우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철도를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합스부르크의 문화 덕분에 19세기 빈은 유럽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파리(프랑스)|파리]]에 비해 화려함은 조금 떨어졌지만 시대를 앞서나가는 진보적인 예술 풍토를 특징으로 했다. 반면 보수적인 측면도 있었는데,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보수적인 측면이 나타난다. 이는 종교 개혁기의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카를 5세 등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속권의 문제에서 교황과 멱살은 잡았을지언정 교권에서는 교황과의 관계가 좋았으며, [[사코 디 로마]]로 유명한 카를 5세 역시도 교권에서는 교황에게 추호의 적의도 품지 않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사코 디 로마]]만 하더라도 카를 5세는 세속군주로서 교황을 찍어누르는 정도를 원했지, 사코 디 로마급의 막장을 원한건 아니였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역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아버지와 성향이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당대 유럽 왕실들과 비교할 때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상대적으로) 성생활도 깔끔하고 사생활 스캔들도 적은 편이였다.[*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나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문란한 성생활로 유명했다. 사실 부르봉의 프랑스 통치는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4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시작되었기에, 합스부르크 입장에서 보자면 기도 안찼을 것이다. 또한 이때 교황들은 마누라를 한 다스씩 챙기던 시대였다.] 다만 이러한 신념형 보수주의 정책은 그만큼이나 호불호도 많이 갈려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의 보호자'로 칭송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악의 축]] 취급을 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장 인터넷에서 네덜란드 독립사 관련 글을 아무거나 읽어보면 십중팔구는 합스부르크 왕조는 악의 축으로 나온다.] 다만 이런 신념형 보수주의는 합스부르크 가문 역사 전체에서 볼 때 그렇게 두드러진 특징은 아니며 고지식했던 카를 5세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이었다. [[빈 체제]]를 들면서 정치 체제에 대한 보수성을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유럽]]의 세습 지배 가문 중에 정치체제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았던 가문은 없었다. 오히려 합스부르크는 동시대의 타 가문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관용적이고 리버럴한 편이었다. 동시대의 [[영국]]이나 [[프랑스]]의 근대사가 중세 질서에서 벗어나 민주적 국가를 수립하는 길을 걸었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봉건 영주 간의 혈연 관계와 작위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나라였기 때문에 국가 자체가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통성은 오스트리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역사적, 민족적 경험이라기보다는 합스부르크 군주가 갖고 있는 작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구상했었던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라는 비전이 현실화됐다면 민족국가보다도 더욱 진보적인 나라가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되 제도와 기술에서는 실리적인 통치로 요약할 수 있다. 이렇게 실리적이고 관용적인 가풍은 이후 오토 폰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히틀러와의 대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출신 신분부터가 하늘과 땅 차이로 격차가 컸지만, 무엇보다 지독하게 편협한 히틀러의 인종, 문화관과 합스부르크의 이 가풍은 절대로 원만하게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 참고로 역사학자 Peter Marshall은 그의 저서 「종교개혁」에서 17세기 후반 유럽이 종교개혁의 '교파화' 시대가 끝났다는 예시로, 합스부르크를 거론했다. >17세기 후반에 국내외 정치에서 헌신적인 신앙의 역할이 줄어들고 종교 전쟁의 시대, 종교개혁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견해는 어느 정도 참이다. 일례로 당대의 정치적 거물인 프랑스의 [[루이 14세]](제위 1656~1715)가 팽창주의 야망을 드러내자 지난날 신념 정치의 기수였던 가톨릭권 오스트리아는 그에 맞서 연합한 신교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 >Peter Marshall, 「종교개혁」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